[스크랩] 불턱
시원하게 뻗은 제주의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무심코 시선이 닿은곳에서 우리는 불턱을 만날 수 있다. 바다와 물이 만나는 곳, 하늘을 지붕삼고 불턱 돌 틈으로 난 바다를 언제든지 볼수 있는, 누구나 쉽게드나들 수 있도록 문조차 달려있지 않은 돌담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향해 열린 방. ‘불턱(bultuck)'. 이곳은 제주도 해녀들이 무질을 하고 난 후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돌담으로 둘러쳐 만들어 놓은 바람막이 시설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불턱 가운데 서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제주의 거센 바람도 잦아들면서 어디선가 그들의 속절없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아침 반찬이야기, 아방(남편)흉보는 이야기에서 방금 물질을 하고 온 바다속 이야기까지 그들의 삶의 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이런 바다와 산을 잇는 공간이 있었기에 제주 해녀가 있어온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지친몸과 마음을 녹이고 서로 몸을 기대며 함께 이겨내는 법을 알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불턱이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새롭게 들어선 시멘트로 지어진 불턱으로 그들의 소리를 엿볼수 없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제주의 해안가를 둘러보다보면 돌을 나지막히 쌓아 올려 원을 쳐놓은 곳을 볼 수 있다. 여기에도 제주해녀들의 질박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기는 매한가지. ‘불턱’ 또는 ‘불톡’ 이라 불리는 이 원형태의 담은 이름 그대로 ‘불’을 피우는 나지막한 ‘턱’으로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물질을 끝내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피해 온몸에 파고든 찬기를 녹이며 힘든 작업을 마무리하는 장소였다.
고무잠수복이 보급된 지금이야 추위가 덜하지만 얇은 무명옷 하나 달랑 걸치고 칼날처럼 일어나는 겨울 파도와 바람을 대하기는 죽음과 같은 시련이었다. 손이 오그라드는 겨울바다에서의 작업을 끝내고 나면 바람을 피해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불턱’이다. 어찌보면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불턱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차갑고 힘든 작업이 가능했었을 것이다.
물질이 끝나 해안가로 나오는 순서대로 마음에 맞는 짝들을 찾아 개개의 불턱으로 모여들면 어느새 자연스레 불이 피워지고 시린 몸이 녹을 쯤 하면 얘기꽃들이 만발하게 피어난다. 문어를 잡으려는데 숨이 차 못 잡고 나와 아쉬워하는 얘기, 손바닥만한 전복을 잡고 자랑하는 얘기부터 시작하다보면 어느새 불턱은 동네 여성들의 사랑방이 된다. 남편이 어제 저녁에 술마시고 주정부린 일, 누구 집에 누구가 이랬더라, 저랬더라까지 맞장구 치며 떠들다, 서로의 이견에 마음이 토라지기도 하다보면 해녀의 사랑방은 불기운만큼이나 따사로워진다.
일종의 여성해방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불턱은 해녀들의 신나는 해방구였던 대신에 남성들로부터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모든 동네소문이 여기에서 퍼지고 남자들의 흉이 여기서 전파되기 시작하는 데야 남성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불턱에서의 좌담들은 그날 저녁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니 이 ‘불턱’ 또한 해녀들만큼이나 모진 신세였던 세이다.
이러한 ‘불턱’이 부부간의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는 아랑곳없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마땅한 놀이터가 없던 아이들은 해변가로 자연스레 모여들고, 불장난이며 잡아온 소라, 문어등을 구어먹기에는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기에, 해녀들이 무질을 끝내고 불턱으로 모여들기까지는 이 ‘불턱’은 온전히 동네 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불턱’으로 모여든 아이들은 이 곳을 사령부로 전쟁놀이를 하다 지치면 해산물을 잡아 구워먹고, 설탕을 녹여 ‘톡톡이’라는 즉석 사탕을 만들어 먹기도 하며 놀다가 물질을 끝낸 어머니가 모습을 보이면, 억센 억양이 꾸지람이 무서워 뒤도 안돌아보고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치던,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던 곳이기도 했다.
제주인 삶의 전부였던 해녀들과 그 추위에 시린 하얀 속살과 인생의 서글픔, 고단함을 따뜻하게 안아주던 ‘불턱’은 모든 제주인의 삶과 연관된 장소였으며, 제주인의 애환이 담긴 곳이기도 했음에, 단순한 돌담의 축조물로 치부하길 허락하지 않는다. 수많은 유물들이 가치를 자랑하며 문화재로 보존되고 보호되고 있는 지금, 보이는 모습이야 허술하고 단순한 ‘불턱’일지언정 그 안에 담고 있는 제주인의 삶의 분량을 생각하면 어떠한 가치로도 측정이 어렵다.
방한용 고무해녀복과 최신시설의 탈의실이 해녀들을 불턱에서 떠나보내고, 돌보는 사람 없이, 허물어지는 ‘불턱’의 돌담속으로 제주의 지난 삶이 묻혀지고 있는 지금, 묻혀진 ‘불턱’돌담의 아픔마냥 그에 대한 내 기억도 묻혀지고 있음에 마음이 아프다.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blueribb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