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제주의 옛 모습 _ 3
제주 농가의 부녀자들.
당초 붙어 있던 제목은 <가래리 농가의 부인>이다. 가래리는 과거 서귀포시 강정동(江汀洞)의 이름이다.
이런 모습은 제주도 전역에서 과거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것으로 유명한 정방폭포, 그하얀 물줄기가 외롭게 보인다. 절벽 위의 나무들이 아직 그리 크지 않았던 때이다
대정고을 농부의 풍속.
단산으로 보이는 산 기슭밭 가운데를 중년의 두 농부가 짐을 지고 지나가고 있다. 흰 바지 저고리에 털벙거지를 쓴 앞장선 사람은 지게 위에 멱서리, 그 위에 쇠스랑을 얹고 있고 갈잠방이 적삼에 대패랭이 차림의 뒤엣 사람 역시 지게 위에 돗거름으로 보이는 짐을 지고 있다. 보리라도 갈러 가는 것일까.
제주 해녀 10명.
오조리 여인 10명을 표본추출하여 사진을 찍은 일제는 다시 제주 해녀 10인을 추출하여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추자도의 해안 바닥에 테우와 어선들이 세워져 있다. 일제의 관헌들로 보이는 제복의 사내들이 서 있는 모습들로 보아 이 사진 역시 조사 과정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포구는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천연 조건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테우와 돛배.
어로수단인 테우와 돛배가 만조의 연안에 한가로이 떠 쉬고 있다. 연안 자갈돌들로 보아 추자의 신양리쯤으로 추정된다.
식민지 시대가 되면서 일본의 잠수기선들이 우리 연안에 자주 출몰했던 것으로 미뤄 이런 열악한 수단을 역이용했을 수도 있다.
추자섬 기슭의 동네.
납작납작 엎드린 초가들이 이야기라도 나눌 듯이 정답다. 갯바닥에 작은 배 몇 척이 보이고 아직 포구는 정지되지 못했던 것 같다. 전형적 옛날 어촌 모습이다.
화북동의 삼사석비.
삼성 신화와 연관되어 세 신인이 활을 쏠때 과녘이 되었다는 돌이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온평리의 혼인지.
삼성혈과 연관되어 세 신인이 벽랑국에서 떠온 공주들을 맞아 혼인을 치루었다는 성산읍 온평리의 혼인지이다.
아득히 뒤로 대수산봉(大水山峰)이 보인다.
형제섬과 용머리의 연대.
산방산 기슭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득히 바다 위에 형제섬이 떠 있고 용머리코지(곶)가 섬 쪽을 향해 미련한 짐승의 머리처럼 내밀어져 있다.
제주성과 성문 어귀의 석무인.
지금 우리가 돌하르방이라고 부르는 성문 어귀의 석상들을 일본인들은 <石武人>이라고 표기했다.
삼성혈을 밟고 선 순사들.
제복을 입고 칼을 찬세 순사가 각기 세 혈의 입구를 밟고 서 있다. 구멍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함으로도 보이지만 그 보다 이렇듯 숨구멍을 틀어막겠다는 상징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북제주군 애월성지.
지의금 애월리 바닷가, 애월초등학교 자리의 애월성지이다. 건물은 옛 관아 건물인 듯한데 일제시 한때는 일본군 고급장교가 주둔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산지내와 망루.
산지내 위에 원형다리모형은<북수구>이다. 아득히 원경으로 보이는 망루는 지금의 제주측후소 부근에 있었던 쾌승정인 것 같다.
산지천의 세월.
산지천의 하류인 듯한 곳에 세월이 놓여 있고, 이 다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저쪽 냇가를 끼고 나있는 길, 그 길가의 높직한 돌담이 눈길을 끈다.
산지내의 물은 풍성하고, 맑으며 그 건너 나즉나즉 엎드린 초가들이 안개에 쌓여 환상적이다.
오현단 부근의 제주성.
옛날 <소래기동산 ; 과거 제주영락교회 자리> 쪽에서 제주성의 동남단 단애를 원경으로 찍은 것이다.
산지천(山地川) 상류의 험준했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이 내의 중심에는 낮은 안경교가 놓여 있는게 보인다.
관덕정 마당에서의 한판 입춘굿놀이.
1910년대까지도 입춘 무렵에 도내 무당들이 우두머리, 즉 <도황수>를 뽑는 입춘굿놀이는 해마다 있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황수는 춤도 잘 출 뿐더러 사설도 정확하게 읊어 모든 무당들의 수장이 되었던 사람인데, 제주에서 마지막 뽑혔던 도황수는 성산읍 신풍리의 洪梅花씨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도 부인들의 풍속.
돌담장과 기와 지붕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옆모습과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다. 한 여자는 통이 깊은 구덕을 지고 있고 한 여자는 짐질 때 받치는 누비 등받이 만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물질이라도 나가던 모양새다.
(퍼온 글)